샨도스의 두 번째 미클로시 로자(Miklos Rozsa. 1907. 4. 18.-1995. 7. 27.) 관현악집이 나왔다. 원래는 첼로협주곡과 나란히 바이올린 협주곡이 실릴 예정이었으나,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파이크(Jeniffer Pike. 맞다. 스타트렉 제2세대 파이크 선장과 같은 성이다)가 아파서 녹음 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구성이 달라졌다. 그래도 음반을 처음 여는 것은 파이크의 바이올린.
로자의 초기 작품 북헝가리 농민요 변주곡, 작품 4는 원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이지만, 여기서는 바이올린과 관현악 판이 연주된다. 피아노 부분을 관현악으로 편곡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어내 신선하다. 변주곡의 대가답게 로자는 소박한 민요선율에 담긴 씨앗을 극적으로 성장시키고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zYuwtXyswUs
관현악 판으로는 로자가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Vienna State Opera Orchestra)를 지휘하고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데네시 지그몬디(Denes Zsigmondy)가 연주한 웨스트민스터 레이블의 음반이 있는데, 지휘자와 연주자 모두 헝가리 출신이어서 그런지 민족적 색채가 짙은 연주이다. 반면 제니퍼 파이크와 감바는 곡의 보편성을 더 확장하고 화려한 색채를 공기 중에 뿌린다. 파이크의 바이올린 음색이 무척 아름답다.
<포도주 상인의 딸>(양조장집 딸. The Vintner's Daughter), 작품 24도 역시 변주곡이다. 헝가리에서 달려온 세 사람의 기사들과 만나는 프랑스 처녀의 꿈을 다룬 민요를 변주한 작품이다. 민요 노랫말의 에피소드를 각 변주에 녹아내 한 편의 드라마가 태어나고 있다. 유진 오먼디의 요청으로 원래의 피아노 곡을 관현악곡으로 또 썼다. 초연은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하였다. 오먼디는 엔딩도 웅장하게 마무리해달라고 요청했다는데, 다행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존의 레퍼런스 음반인 제임스 세더리스/ 뉴질랜드 심포니의 코흐 음반은 균형이 잘 잡힌 아주 좋은 연주이지만, 감바/ BBC 필하모닉의 열정적 화려함과 거침없는 질주에 비하면 좀 모범생 같은 느낌이다. 토니 토마스의 내레이션이 붙은 뉘른베르크 심포니(녹음 당시에는 프랑켄란트 주립 심포니)의 LP음반이 있는데, 감바가 지휘한 BBC 필하모닉보다 오케스트라의 기량이 현저히 떨어진다.
루몬 감바의 해석은 기존 연주에 비하여 템포와 색채를 극적으로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관능적 아름다움과 박진감, 프랑스 정신을 절묘하게 잘 살려낸 연주이다.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프랑스와 헝가리의 색채를 함께 살려내야 하는 만큼 표현이 쉽지 않은 곡인데 감바와 BBC 필하모닉은 정말이지 잘 해냈다.
헝가리 야상곡, 작품 28은 조용한 음악 진흥 프로젝트를 벌였던 에드워드 벤자민(Edward B. Benjamin)의 위촉을 받아 쓴 곡. 긴장을 이완시키는 조용한 음악을 원했던 벤자민의 기대는 충족되었을까?
로자 자신의 말처럼, 헝가리 농촌의 밤에 담긴 드문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조용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8분 동안 계속 피아니시모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라는 작곡가의 말처럼 곡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비극적인 클라이막스로 질주해간다. 평소 로자 스타일을 생각할 때 변함없이 조용히 음악을 끌어갈리 만무한 일.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초연 당시를 로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피아니시모로 곡이 시작되자 벤자민은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포르티시모로 가자 얼굴을 찡그린다, 곡이 다시 조용해지자 미소가 돌아온다, 연주가 끝난 뒤 벤자민은 말한다, “작곡가들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그대로 이해시킬 수가 없군요."
결국 벤자민은 자존심만 내세우는 제멋대로인 작곡가에게 항의 한 번 못하고 돈만 날렸고(?), 로자는 점잖은 음악애호가의 간절한 기대를 배반한 셈. 나 같으면 당장 작곡료 돌려달라고 했을 것(물론, 농담이다). 내가 작곡가라면 여리고 조용한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미세한 다이나믹과 다채로운 관현악법으로 갖가지 색깔을 만들어내 벤자민도, 나도 모두 만족할만한 음악을 제대로 썼을 텐데... 비전문가의 멋대로 상상은 이 정도로 해두자. 여하튼 이 아름다운 곡은 살아남았고, 벤자민도 곡과 함께 불멸의 이름을 얻었으니 시간이 보상한 셈이 아닐까?
CD로는 균형이 잘 잡힌 세더리스/뉴질랜드 심포니의 연주(KOCH), 가장 느린 템포로 세부를 음미하는 스몰리지/부다페스트 심포니의 연주(NAXOS)와 알베르트/필하모니아 훙가리카(CPO)의 빠르고 긴장감 넘치는 연주가 있고, 그 중 세더리스가 지휘한 연주가 가장 뛰어나다. 감바의 해석은 템포 설정에서는 맨 마지막 알베르트 지휘 연주에 가깝다. 그러나 유사함은 템포에서만 끝난다. 역시 뜨거운 정열이 불타오르는 감바의 해석은 다른 연주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독특함이 있다. 정열이 통제된 세더리스 판의 균형감각은 참 훌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빠른 템포와 색채감의 강조로 강한 감성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감바의 신보 쪽에 더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어둡고 심오한 첼로 협주곡, 작품 32의 음반에는 이미 좋은 연주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린 해럴의 강철 같은 테크닉과 요엘 레비/아틀란타 심포니의 정교한 지원이 돋보이는 텔락 음반이 연주와 녹음 양면에서 가장 뛰어날 것이다. 해럴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폴 왓킨스(Paul Watkins)의 첼로와 감바의 BBC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놀랍게도(!), 해럴 음반과 대등, 아니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매력적인 조화를 만들어낸다. 윤기 있고 서정적인 왓킨스의 첼로는 감성적이면서도 음악적인 중용을 잘 지키고 있는데, 여기에 극적이고 화려하며 열정적인 감바의 오케스트라가 조합되니 그 효과는 묘하게 관능적이고 화려하며 짜릿하다. 이처럼 짜릿한 흥분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로자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제2악장이 상대적으로 다소 건조하여 아쉬웠던 해럴보다, 왓킨스는 서정적인 노래도 정말 잘 한다. 진정으로 주목할만한 첼리스트의 등장이다. 지금까지 나온 로자의 첼로 협주곡 음반 중 가장 귀를 잡아 당기는 매력이 있다. 아마 가장 뛰어난 연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리즈의 두 번째 음반을 들어보니 이제 루몬 감바는 진정 로자 전문 지휘자가 된 듯하다. 강력 추천!
제니퍼 파이크가 연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 실릴 제3집이 어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 그라모폰 2011년 9월호 편집인이 뽑은 10대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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