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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클로시 로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니퍼 파이크, 하이페츠 옆에 서다

Miklós Rózsa

by 최용성 2016. 2. 27.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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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은 긴 세월이다. 샨도스의 로자 관현악곡 제3집은 작곡가가 그 기간 동안 내놓은 중요한 세 곡을 담고 있다. 젊은 작곡가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던 1933, 영화음악 분야에 들어와 명성과 부를 누린 개인적 안정의 시기이면서도 정작 조국 헝가리는 전쟁의 참화 속에 고통 받고 있던 1943, MGM 영화사에서 사극 음악의 대가로 인정받으며 경력의 정점으로 오르던 1956. 묘하게도 로자가 영화음악에 뛰어들기 전인 1933년에 작곡된 주제, 변주와 피날레, 작품 13이 가장 영화음악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오보에 독주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창작선율은 동경에 가득 차 있다. 브람스의 목가를 연상시키는 첫 번째 변주를 지나면 주제는 극단을 오가며 팔색조로 변주된다. 특히 네 번째 변주는 필름 느와르 음악의 어두운 세계를 그리고 있고, 일곱 번째 변주는 뒷날 <수퍼맨>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박진감이 넘친다. 오리지날 주제가 다시 돌아오는 피날레의 투티는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을 안겨준다. 로자는 1943년에 이 곡을 개작하였는데, 주로 오리지날 버전의 피날레 일부를 잘라내 구성적으로 간결하고 명쾌하게 바꿨다.

 

    루몬 감바는 오리지날 버전을 택하여 연주하였는데, 그 효과는 개정판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너무 깔끔하고 앞뒤로 정확하면 뭔가 매력이 없어지기도 하니까. 다만 개정판 자체로도 훌륭하니 이건 그날그날 달라지는 입맛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적절히 밀고 당기면서 이완과 질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헝가리 민요의 특성을 느끼게 하는 감바 지휘, BBC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색감이 진하고 화려한 연주가, 단정하고 모범생 같은 세더리스의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KOCH 3-7191-2)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로자 지휘, 프랑켄란트 주립 심포니 오케스트라(MCA. Varese Sarabande)의 개정판 연주를 훌쩍 뛰어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심지어 감바의 해석과 BBC 필하모닉의 연주는 로자협회 사가판으로 들을 수 있는 존 마우체리 지휘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실황녹음이나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설적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데뷔 실황녹음 같이 일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개정판 녹음보다도 훨씬 더 탁월하다.

 

Rumon Gamba

 

    10년 뒤인 1943년에 작곡된 현악 협주곡, 작품 17은 로자가 미국에 정착하고 처음 작곡한 콘서트 음악이다. 표제는 없지만 헝가리의 고통이 모든 소절마다 있다라는 크리스토퍼 파머의 표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 정조가 내내 흐른다. 전통적인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에서는 소나타 형식, 푸가, 대위법 등이 절묘하게 구사되어 있어 악곡 형식과 폴리포니 구현에 능한 신고전주의 작곡가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좋은 연주가 몇 개 있다. 우선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세부를 조탁하여 프레이징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준 제임스 세더리스,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KOCH 3-7379-2)의 연주가 대단히 훌륭하다. 코흐의 로자 시리즈 중 가장 뛰어난 연주 중 하나일 것. Csaba 지휘의 비르투오지 디 쿠흐모의 연주(Ondine ODE 919-2), 해석의 통찰력은 아주 약간 떨어질지 모르지만, 뉴질랜드 현악주자들보다 좀 더 생생하고 활기찬 음향을 들려주는 것이 강점. 특히 둘째 악장에서는 유장한 호흡으로 비교음반들 중 가장 긴 연주를 들려준다. 아이샤 잭슨이 지휘한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KOCH 3-7152-2)도 베이스가 무겁게 깔리는 독일 악단 특유의 중후함이 장점이지만, 앞의 두 연주에 비하면 역동성 면에서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감바와 BBC 필하모닉은? 모든 연주들의 장점을 모아놓은 것 같다. 밀고 당기고 뜨겁게 질주하면서도 이완하며 디테일을 그려내는 데에도 강한 지휘자 감바의 장점이 그대로 구현되고 있고, 오케스트라 음향은 정교함과 활력, 중후함과 화려함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오랜 세월 동안 로자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24는 야샤 하이페츠의 독점물이었다. 그가 초연 후 월터 헨들이 지휘한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RCA 음반은 어떤 독주자도 넘어서지 못한 에베레스트였다. 첫 도전은 코흐의 로자 시리즈 제4집에서 이고르 그루프만이 하였다. 주목할만한 시도였고 장점도 많았지만, 너무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접근한데다가 울림이 과장된 독특한 녹음 때문에 많은 애호가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 다음에 나선 것은 로버트 맥더피와 요엘 레비, 애틀란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Telarc CD-80518). 맥더피의 헌신적이고 정열적인 독주와 레비의 정교한 서포팅, 텔락 엔지니어들의 탁월한 녹음에 힘입어 하이페츠와는 또 다른 관점을 드러낸 해석으로 비평과 대중의 반응 양면에서 모두 성공하면서 나름 위치를 잡은 음반이다. 이어 낙소스 레이블에서 아나스타시아 키트루크와 야블론스키 지휘, 러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반이 나왔다. 매력적인 부분들이 적지 않은 괜찮은 연주이지만, 레비가 지휘한 애틀란타 팀이나 헨들 지휘, 댈러스 팀에 견주기에는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이 역부족이고 독주에도 개선할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은 매튜 트루슬러 독주, 야수오 시노자키 지휘, 뒤셀도르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반(Orchid Classics ORC100005). 코른골트, 퐁셰, 벤자민, 포스터 등 커플링이 독특한 기획이고 들을만한 연주여서 감상의 재미는 있지만, 독주나 오케스트라 모두 최고 수준을 기준으로 보자면 아쉬운 점이 있다.

 

 

Jennifer Pike

 

    이런 판국에 제니퍼 파이크가 나섰다. 여성으로는 두 번째인 셈. 원래 제2집에 첼로협주곡과 나란히 커플링될 예정이었지만 몸이 아파 미루어진 녹음인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 제니퍼 파이크의 바이올린은 은빛이 반짝이는 듯 대단히 아름다운 톤을 뽑아낸다. 이 아름다운 톤을 기저에 깔고 악구들의 서정적 특성을 다채로운 뉘앙스로 보여준다. 독주자의 기교적인 완벽성은 최고 수준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톤과 섬세한 뉘앙스, 잘 다듬어진 고품위한 정서는 다른 연주자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둘째 악장은 제니퍼 파이크의 음악적 표현력이 다른 모든 연주를 압도할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렇다면 단점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하이페츠의 불꽃 튀는 백열과 압도적 기백, 극한까지 치밀어 오르다 극적으로 연소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파이크에게는 약하다. 맥더피와 비교해서 파이크가 밀리는 것도 남성적인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굳이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제니퍼 파이크가 만들어내는 음악 사이에서 에너지의 분배는 매우 잘 되어 있어 그 자체로 만족스럽다. 오히려 제니퍼 파이크의 섬세한 여성적 표현력에는 맥더피나 다른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하이페츠도 따라가기 힘든 경지가 있다. 게다가 긴 호흡으로 악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파이크와, 늘 그렇듯이 독주자에 적절한 서포트를 제공하는 루몬 감바와 BBC 필하모닉의 멋진 연주력이 결합하여 누구라도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결론은 이렇다. 바이올린 하나만 놓고 보면 여전히 하이페츠가 압도적인 에너지와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 절대지존인 바이올린의 신 바로 옆에 여신이 아름답게 반걸음 정도 앞서 서 있다. 제니퍼 파이크이다. 그녀의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고귀하고 팔색조 같은 아름다움은 하이페츠와는 전혀 다른 음악적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 음악적 호소력은 하이페츠를 뛰어넘는다. 게다가 여신이 거느린 악단이 하이페츠의 군단보다 더 잘 연주한다. 그들 사이 그야말로 아주아주 조금 뒤쪽에 로버트 맥더피와 레비의 애틀란타 군단이 있다. 엄청난 집중력과 폭발적인 연소를 듣고 싶다면 빠르게 질주하는 하이페츠, 서정적이고 정교하면서도 품격 있는 아름다움을 긴 호흡과 다양한 빛깔 속에서 느끼고 싶다면 아름다운 은빛 톤의 파이크, 둘과는 다른 남성적이면서도 감미로운 여성성을 공유한 제3의 길을 찾고 싶다면-특히 마지막 악장 엔딩이 다르다. 난 이 대체 엔딩이 좋다-맥더피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두 들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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