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허초희)은 자신의 재능을 귀히 여기는 아버지(허엽)와 오빠(허봉)의 보살핌 속에 조선의 천재 시인이자 문필가, 화가로서 재능을 맘껏 발산하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혼인 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현모양처 구실을 하라는 압박에 억눌려 살다가 어린 두 아이를 먼저 보내는 크나큰 고통과 슬픔을 겪습니다. 게다가 의지하던 오빠 허봉마저 귀양 가 객사하니 그 마음의 고통은 천재 시인을 무너뜨립니다. 허난설헌은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자신이 남긴 시를 모두 불태우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여성 천재 시인이 시대의 억압 속에서 살다가 “내 시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요절한 비극 서사는 후대 예술가들이 창작 소재로 삼기에 적합하지요. 허난설헌을 다룬 오페라나 뮤지컬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천욱이 작곡하고, 이난영이 대본을 쓴 광주시 오페라단(단장 이정례)의 2022년 창작 오페라 <허난설헌>(주관: 광주문화원. 후원: 광주시의회. 연출: 유혜상. 음악코치: 우수현)은 어떤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또 어떤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2022년 10월 15일 오후 6시에 열린 김천욱의 오페라 <허난설헌> 공연(이태영 지휘, 오푸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용: 이희원, 남정인)은 완막이 아니라 쇼케이스라고 했지만, 막상 공연을 보니, 1시간 20분 가까이 진행되는 완막의 콘서트 오페라 형식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의 시작은 시인 허정분 선생이 열었습니다. 허정분 선생이 담담하게 '곡자'(哭子)를 읽어갈 때 이미 객석에서 흐느낌이 들렸습니다. 사랑스러운 손녀를 보낸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시인의 마음이 아들딸을 떠나보낸 허난설헌의 통곡과 시대를 넘어 공명(共鳴)하면서 ‘곡자’의 울림은 더 절절하고 시리게 다가왔습니다.
▶ 관련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9783&CMPT_CD=TAG_PC
도입부에 허난설헌과 같은 이름인 후대 조선 역관의 딸인 초희(이경진. 소프라노)가 배경을 설명하면 플루트와 클라리넷, 오보에가 서로 이어가면서 음악이 시작되는데, 대단히 한국적인 서정이 아름답게 흐릅니다. 아직 노래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이 부분 음악은 뭔가 아름다운 세상이 열릴 것 같다는 설렘을 줍니다. 이어 어린 난설헌 즉 허초희(박정현. 정가)가 첫 노래를 부릅니다. “어젯밤 꿈에 봉래산에 올라 목마른 용을 맨발로 올라타니/ 초록 구슬 지팡이 짚은 신선이 나를 반기네.” 이렇게 호방하고 기개 넘치는 시 ‘감우(感遇)’를 텍스트로 한 웅혼하면서 아름다운 곡을 어린 초희(박정현. 정가)가 국악 정가로 부르며 바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것을 이어 부르는 소프라노 이경진의 가창이 훌륭합니다. 이경진과 박정현과의 이중창은 허난설헌의 시가 바로 오늘 쓰인 것처럼 생생한 감동을 줍니다. 민요나 다른 국악 어법을 쓰지 않은 것 같은데도 대단히 한국적인 곡의 신선함과 무엇인가를 동경하는 극상의 아름다움에 전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펼쳐지는 김천욱의 음악은 오페라가 끝날 때까지 양식이나 내용 면에서 참으로 다채롭게 인간의 희노애락,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 아름다움에 이릅니다. 21세기에 여전히 세련되고 독창적인 조성음악으로, 국악 소재를 인용하거나 모방하지 않고도 한국적 혼을 불러일으키며, 청중과 긴밀히 교감하여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어 오빠 허봉(김일훈. 베이스)과, 당시 조선의 기준으로는 어른이 된 허난설헌(오희진. 소프라노)의 정감 어린, 그러나 안타까운 시대 상황을 담은 대화가 나옵니다. “하늘거리는 난초는 얼마나 향기로운가”로 시작하며 이어 “칼바람 불어와 잎새에 스치니/ 오 슬퍼라. 차디찬 서리에 시드는구나”라며 앞날을 예감하는 불안하고 슬픈 느낌에서 “고운 빛 사라져도 끝까지 맑은 향기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슬픈 다짐으로 이어지는 짧은 노래가 허난설헌의 인생을 압축하듯 절묘하게 불립니다. 이어 난설헌이라는 호를 짓는 노래가 세 박자의 리듬을 깔고 허난설헌과 허봉의 활기찬 이중창으로 진행됩니다. 이어서 오보에 독주와 호른의 응답으로 시작되는, 오빠 허봉이 동생을 걱정하며 부르는 노래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뒤로 갈수록 앞으로 나올 중요한 음악적 소재가 나타납니다.
허난설헌과 남편 김성립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아주 인상적인 음악이 흐릅니다. 국악에서 원용한 창법 같은데 딱히 국악 창법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독특한 창법에, 세련된 화성으로 오묘하게 신비롭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일품인 ‘모춘(暮春)’(“안개는 하늘에 자욱해 학은 돌아오지 않고/ 계수꽃 그늘 속 구슬 문은 닫히었네”로 시작)은 소프라노 오희진의 절창에 매혹당하고야 마는 걸작 아리아입니다. 이에 응답하는 김성립(김성결. 바리톤)이 노래하는 학자의 도리, 그에 응답하는 허난설한의 노래가 또 절묘한 분위기의 이중창을 만들어냅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노래하는 바리톤 김성결의 시원스러운 독창이 끝나자 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혼인 후 태도를 바꿔 시를 포기하라는 김성립과 대립하는 허난설헌의 이중창은 극적 긴박감을 조성합니다. 유머러스하게 “부끄러운줄 알아라”라고 후렴을 반복하는 시어머니(최혜영. 메조-소프라노)의 신랄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노래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메조-소프라노 최혜영이 여기서 나이를 초월하여 위세가 대단한 시어머니 모습을 열연하여 청중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허난설헌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노래와 시어머니의 노래가 어우러져 묘한 슬픔과 웃음이 교차합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지은 시 ‘곡자(哭子)’를 허난설헌 역의 소프라노 오희진이 섬세한 감정선을 타며 부릅니다. 김천욱 작곡가는 오페라 <인형의 신전>이나 피아노 연탄곡 <존재, 소멸 이후>, 피아노 독주곡 <날으는 번데기>, 그리고 가곡 <서천 꽃밭에서> 등등의 작품에서 상실의 아픔을 독특한 화성과 시리게 아름다운 선율로 승화시켰는데 허난설헌의 이 노래에서는 그 절정에 이른듯합니다. 객석은 숨죽인 듯 조용했고,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아니, 이미 제 눈시울도 뜨거워졌으니 다른 분들 반응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이 부분 음악은 <인형의 신전>에서 딸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노래와 시대와 지역을 넘어 통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허균과 김성립의 이중창은 박력있게 군사적 느낌으로 강한 효과를 줍니다. 이어 뜻밖에도 허난설헌이 아니라 허균(강동명. 테너)이 부르는 허난설헌의 시 ‘견흥(見興)’ (“오동나무 한 그루, 역산 양지에서 자라나/ 여러 해 차가운 그늘을 견디었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에 딱 들어맞는 아름다운 한국적 선율을 테너 강동명이 대단한 미성으로 부릅니다. 이어 허난설헌이 “나의 봄은 어디에, 나의 봄은 언제쯤”이라며 시작되는 아리아는 허난설헌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선율로 연상시키는데, 그 그리움의 정서는 아련한 감동을 줍니다. 소프라노 아리아의 정수를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허난설헌이 자신의 시를 두고 부르는 중요한 노래가 있습니다. “내 어릴 적 행복한 기억 속에도 네가 있었고/ 오라버니가 이 세상 떠나셨을 때에도 네가 내 곁에 있었고/ 내 아이들이 떠날 때에도 너는 나를 지켜줬구나/ 내 숨 자리 마디 마디에 늘 나와 함께 했구나”라는 대목은 이 오페라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정수 같았습니다. 바로 그처럼 “나의 모든 외로움 끝에 네가 있었구나”라고 느끼기에 “내가 가는 그 길 외롭지 않게 나와 함께 가자꾸나” 그래서 “나와 함께 날자꾸나”에 이릅니다. 그렇기에 내 고통, 내 사랑, 내 그리움인 시를 태워야만 하는 역설(逆說), 즉 내 인생 그 자체이기에 결국 내가 세상을 떠나면 불태워져야 한다는 역설, 참으로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창작의 기쁨과 고통, 예술로도 뛰어넘기 어려운 삶의 고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함께 가야 하는 예술가의 절대고독과 작품 사랑이 동시에 느껴지는 난설헌의 참으로 절절하고 슬프지만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복잡한 심경을 김천욱의 음악은 절묘하게 풀어내고, 오희진은 놀라운 절창을 합니다.
이어서 ‘어젯밤 꿈을 꾸었단다“라는 말과 함께 나오는, 전율이 일만큼 감동적인 아리아 ”푸른 바다는 신선 세상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로 이어지는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의 마지막 대목인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물들어 떨어지니/ 달밤 찬 서리 위에서 차가워라“라는 부분은 원시를 살짝 변형한 것인데, 보통 허난설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쓴 시라고 합니다. 이 짧은 시를 다루는 김천욱의 음악은 꿈많던 어린 시절, 그리움, 인생의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비극적인 아픔으로 끝납니다. 마치 죽는 순간, 삶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듯, 절절하게 가슴 시린 음악은 비극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페라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허난설헌 이후를 다룹니다. 남은 이들이 기억하고 그리며 다시 읽는 그의 시.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허난설헌을 부르는 이유, 그리고 이에 답하듯 허난설헌의 시혼(詩魂)이 다시 돌아오는 생명과 예술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이 열립니다. 그것은 몽유광상산의 비극적 시어를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피어나니/ 태양처럼 찬란하여라“라고 변형하여 희망과 부활의 감격을 극적으로 노래하는 감동적인 음악으로 구현됩니다. 떨어진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오페라 무대에서 다시 피어나니 생명과 예술과 인간은 순환합니다. 이 피날레 음악이 너무 감격적이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난설헌은 우리 마음 속에서 부활합니다. 이 오페라를 본 이후에는 허난설헌의 시와 인생을 기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작가는, 작품은 오페라를 통하여 시대를 넘어 영생을 얻습니다.
▷ 모노녹음에, 원테이크이지만 동영상은, https://www.youtube.com/watch?v=G-FZ0gcA6iw&t=1481s
김천욱의 음악은 한국적인 혼이 느껴지는데 특별히 국악이나 민요를 인용하거나 선법을 쓰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단히 화성적으로 세련되고 구성적으로 치밀하게 짜인 밀도 높은 음악입니다. 전작인 <인형의 신전>도, 한국 오페라에서 보기 드물게 그리스 신화를 다루면서 멋진 서사극 음악 속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함, 신도 사랑도 조국도 잃는 고통, 양심의 가책, 망향 등을 감동적으로 들려주었는데, <허난설헌>에서는 한국적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기억에 남는 많은 노래들로 청중들과 더 깊이 교감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엄청난 환호와 열광 속에 마무리된 공연의 성공에는 출연진들이 각자 자기 몫을 제대로 한 공헌도 적지 않습니다. 음악가가 아닌 허정분 시인은 청중의 관심을 단박에 허난설헌에게 끌어옵니다. 어린 초희를 맡은 국악 영재 박정현이 너무나 잘 노래하고 연기하여 허난설헌에 대한 청중의 친밀감을 훌쩍 올려놓습니다. 내레이션을 맡은 역관 초희 역의 소프라노 이경진은 정확한 딕션으로 정감 있는 해설을 하여 오페라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도를 한껏 높입니다. 게다가 박정현과 함께 하는 무대에서 호소력 있는 가창으로 청중의 마음을 허난설헌과 연결시켜 줍니다. 큰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허균 역의 테너 강동명은 개성있는 미성(美聲)으로 누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잘 그려냈고, 특히 허난설헌의 절묘한 시 <견흥>을 아주 잘 부릅니다. 허봉 역의 베이스 김일훈은 노래는 물론이고 연기로도 동생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시어머니 역의 최혜영은 나이를 잊게 하는 명연기를 보여줍니다. 얄밉지만 당대의 여성관에 사로잡혀 있던 남편 김성립 역을 맡은 바리톤 김성결은 시원시원한 발성과 풍부한 성량으로 캐릭터를 잘 소화하여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히로인 소프라노 오희진. 서구인 같은 화려한 외모의 멋진 디바이기에 허난설헌과 잘 맞을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였지만, 기우였습니다. 마치 허난설헌이 오페라 디바로 환생하여 무대에 오른 것 같았습니다. 오희진은, 뼈를 갈았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 엄청난 준비를 하였는지, 혼신의 열창과 연기가 오페라 전체의 완성도를 극상으로 끌어올릴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브라바, 브라바, 브라바! 오희진의 열창에 공명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많았다는 말로 여러 가지 느낌을 요약하고 싶습니다. 아마 허난설헌이 보았다면 크게 만족하고 오희진을 꽉 안았을 것 같습니다.
김천욱의 창작 오페라 <허난설헌>은 보기 드물게 한국인의 정서를 깊이 건드리는 아름다운 음악과 역사에 기초한 이야기의 힘이 대단한 만족감을 줍니다. 오페라든, 연주회든, 영화이든 최근에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흐르게 만든 작품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이 놀랍습니다. 제대로 예산을 투입한 완막 공연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공연되기를 희망합니다. 오페라 속의 여러 곡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 것같은 예감이 듭니다.
허난설헌이 우리 시대의 시인으로, 예술가로 시대를 넘어 우리 곁에 찾아와 영원히 존재하게 만든 오페라가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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