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성은 왜 감성을 찾아갔을까?

음악가와 음악

by 최용성 2023. 4. 3. 17:12

본문

.

 

    김진수 음악감독이 이끄는 앙상블 에클라(Ensemble ECLAT)는 독주곡에서 실내악곡, 소편성 관현악곡까지 아우르는 연주단체인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연주회마다 내세우는 음악적 화두이다. 2021 정기연주회의 화두는 감성과 이성의 조우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아무리 작곡과정이 이성의 통제 아래 진행된다지만 결국 음악은 이성과 감성의 결합체 아닌가. 원래부터 함께 있는 것들끼리 새삼 무슨 조우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문득 20세기 서양음악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낭만주의 예술을 동원한 감정과잉의 비이성적 선동과 결합된 전체주의의 광기를 체험한 서구 예술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성을 버리고 더 나아가 음렬주의로 가는 길만이 상실한 이성을 회복하는 복음처럼 받아들여졌다.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상업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다. 그렇게 새 시대를 선도한다고 나선비록 수로는 일부이지만 학문적 영향력은 가장 컸던 경향의 창작음악은 일반 청중의 감성에서 멀어지면서 그들만의 리그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느끼며 인간성을 고양시키고 함께 소통하는 즐거움을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우리 시대의 음악을 찾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지친 우리들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교감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이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이야말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작곡가가 감성과 이성의 조우라는 화두에 창의적으로 응답할 때가 아닐까.

 

    김천욱의 피아노 삼중주 “con spirito”는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온 영혼이, 미지의 세상이 주는 불안을 넘어, 작은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영적인 성장과 고양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작품 같다. 곡의 중심점이 마치 영혼의 씨앗처럼 존재하고, 발전하는 모든 음악적 아이디어가 그 영혼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전개되어 시원적(始原的)인 구심력이 작용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곡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한 편의 산조 같다. 현악기가 미끄러지듯이 하강하면서 시작하는 도입부에서부터 피아노의 현이나 펠트를 건드리면서 마치 산조의 다스름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음의 조각들이 끈질기게 쌓이다가 비로소 첼로부터 선율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노래가 펼쳐져 듣는 이의 가슴에 스며드는 과정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경이로웠다. 재즈 같은 리듬이 나타나면서 흥겨운 에너지가 발산되어 빨라지는 후반부는, 자진모리로 치닫는 산조처럼 생명력의 절정을 느끼게 해준다. 국악 어법이나 음계를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자연스럽게 국악적, 아니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국적으로 다가오는 점이 특이하고 인상적이었다. 세상사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KJKMLgOU0 

 

    김진수의 해바라기 핀 들판의 야상곡”(Nocturne in Sunflower field)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피아노로 편성된 실내악곡인데, 작곡가가 직접 지휘하였다. 첫 부분은 현대음악답게(?) 난해하게 진행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내러티브가 명료하고 대단히 아름다운 곡이었다. 곡을 흐르는 정서는 향수, 그리움, 고독이다. 비올라와 첼로가 만들어내는 글리산도가 대단히 효과적으로 해바라기 핀 들판에 부는 바람을 표현해내고 있다. 클라리넷에 이어 제1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클라리넷과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여기서 스페인 들판에서 본 외면의 풍경과 작곡가 자신의 내면의 풍경이 조우한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짙은 향수와 고독이 느껴지는 대단히 아름다운 감성의 세계로 들어와 있다. 템포가 바뀌면서 스페인 마을 풍경과 여인의 춤이 나온다. 그런데 왜 국악의 장단이 연상되는 것일까? 춤을 묘사하여도 그 기저에는 즐거움보다는 여전히 아련한 그리움과 짙은 고독이 깔리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힘든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들린다. 클라리넷이 이끌면서 느린 부분이 시작되고 아주 짧은 푸가토 같은 부분이 나오다가 첼로 독주에서 클라리넷이 입혀지는 부분이 대단히 아름답고 아련하여 가슴을 저민다. 거기에서 선율이 확장되는 부분은 대단한 감동을 준다. 다시 여백을 거쳐 곡 앞부분의 풍경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마무리가 아주 좋다. 논리적인데도 한국적인 여백의 미가 느껴지고, 피아노 음표 하나로 마무리하는 종결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풍부한 감성적 표현을 이성이 그려낸 음악적 논리 속에 절묘하게 융합시킨 김천욱과 김진수의 작품들은, 나란히 연주된 세 곡의 20세기 음악들이 추구하는, 강렬한 감성적 호소를 이성의 질서 안에 결합시키는 자세와 통한다. 에르빈 슐호프의 현악사중주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은 나치에 의하여 퇴폐음악으로 낙인찍힌 곡인데, 20세기 초반 불안한 세계질서를 반영하는 긴장감 속에서 다양한 춤곡의 리듬을 잘 살려냈다. 체코 민족음악의 전통이 흐르는 점이 특징이다. 슐호프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현대 체코음악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네 연주자들은 날카로운 예민함으로 팽팽한 긴장을 그려내 시대의 불안을 잘 살려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6ki5_rrTCE 

 

    프란시스 풀랑크의 피아노와 관을 위한 오중주, 작품 100은 감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작곡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20세기에 활동하였지만 풀랑크는 즐거움을 위한 음악, 아름다움을 위한 음악을 타협 없이 쓴 정직한 작곡가였다. 우리나라는 현악기 강국이라는 속설이 있지만 이날 연주를 들으니 이제 관악기 강국라고 말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악기 연주자들이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특히 호른이 제대로 중심을 잡아주어 연주 전체의 완성도가 대단히 높았다. 음향적으로는 호른을 좀 더 뒤에 자리하게 할 법한데, 다른 목관악기 주자들과 함께 나란히 중심에 앉았지만 음의 밸런스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놀라왔다. 세계 톱클래스 연주자들의 음반을 듣는, 아니 그 이상으로 앙상블이 훌륭한, 대단한 명연이다.

 

    탄생 100년을 맞은 피아졸라는 훌륭한 스승 나디아 불랑제의 조언에 따라 거리의 음악을 자신의 음악 뿌리로 삼았다(역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말콤 아놀드도 대중음악적 요소를 당당히 활용한 일급 작곡가여서 이날 연주회에서 피아졸라와 나란히 연주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중이 좋아하는 감성을 담아낸 창의적인 음악이 가능하다는 것을 피아졸라는 멋지게 증명해냈다. “항구의 사계는 수많은 버전으로 편곡되었는데, 이날은 피아노 3중주 버전이 연주되었다. 원래 한 곡으로 쓴 게 아니라 연주마다 악장 순서도 제 각각인데 여기서는 작곡 순서대로 여름부터 시작하고 있다. 세 연주자들은 강한 집중력과 성실성으로 피아졸라의 세계를 잘 그려냈다.

 

    우리 시대 창작음악이 기존 명곡들 못지않은 감동을 줄 수 있고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며 연주회에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체험한 소중한 기회였다. 깊은 감동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연주회장을 나섰다. 길이 번영하라, 앙상블 에클라여!

 

♬ 2021년 10월 9일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에서 앙상블 에클라의 정기연주회를 감상한 후 작성한 글인데, 《음악춘추》 2021년 12월호 110-113면에 실렸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