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 속에는 창작자의 생체 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氣)가 담겨져 있어 그것이 감상자의 몸과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내 안의 우주에 이르는 길>의 저자인 기철학자 곽내혁 선생은 '기의 미학‘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기의 미학에 입각할 때 작품에 담겨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정보마저 기의 장이라는 느낌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기의 미학의 정점은 무엇보다 먼저 내 안에서 분별, 거리감이 사라져 온 우주를 내 것과 다르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다. …내 안의 하나됨이 우주와 하나됨으로 나타나 우주 의식, 우주심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은 평탄해질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거리감과 그에 근거한 외로움, 외로움의 또 다른 표현인 아름다움의 세계는 사라진다"(곽내혁, 내가 열리면 세계가 열린다, 창해, 2006, 100~102쪽)
기의 미학이 가려고 하는 지향점은 대체로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는 타고난 단독자로서의 개체성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실존적 고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외로움의 미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 작품으로 제대로 정화된 외로움에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통한 역설적인 구원의 힘이 담겨져 있기도 하거든요.
외로움의 미학이 '기의 미학'과 조화되면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미술 작품이 있습니다.
갯벌을 소재로 한 문인환 화백의 <침묵의 땅> 연작이 그것입니다. 대상인 갯벌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도 화려하거나 세련되고 예쁜 색감으로 보는 사람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그림이 인테리어 소품(어떤 이들에게는 투자대상)으로 전락한 요즘 유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연 또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우직한 경외감 같은 정서가 작가의 붓에서 깊게 배어나옵니다. 그것은 인공적인, 그렇기에 기만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자연 본래의 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외면해오고 있는 그 근원 또는 진실에 대한 정직한 대면 덕분에 문인환 화백의 작품들은 단순함 속에 세상 전부를 담아내는 듯한 강력하고 심오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인환 화백의 모노톤은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담아내고, 갯벌 위에 남겨진 단순한 흔적 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복잡성이 함축되어 나타납니다. 구름이 펼쳐진 하늘과 갯벌이 만나는 수평선(또는 지평선)은 이상과 현실, 고뇌와 구원, 분리와 통합이 긴장하고 대립하면서도 함께 만나 화해하고 치유할 가능성을 내포한 듯합니다. 대상(오브제)의 사실성은 화폭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로 한없이 열려있는 영성(靈性)으로 치환됩니다. 문인환 화백의 그림이 갖는 이러한 아우라(aura)는 너무도 근원적이어서 종교적인 감동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문인환 화백의 그림에 묘사된 여러 가지 갯벌 풍경을 전체와 부분, 하늘과 땅(바다), 땅과 물, 진흙과 돌, 빛과 어둠, 분할과 통합 등등의 많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다양한 내면의 풍경, 즉 진경(眞景)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거듭하여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심지어 클로즈-업된 갯벌풍경에 담긴 사람의 흔적(연흔)에서는 비구상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처럼 시각적 상상력을 다양하게 열어놓는 놀라운 개방성 덕분에 시간이 흐를 수록 이 연작들이 주는 감동은 더 커질 수밖에 없지요.
"갯벌을 소재로 인간의 이기적인 편리함만을 위하여 훼손되고 있는 갯벌의 실제적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갯벌이 주는 외형적 이미지의 재현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 자연과 인간과의 친숙한 상호소통을 위한 궁극적 의도와 그 안에 내재된 자연과 생명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제시하고 싶었다"라고 하는 작가의 말이 치열하고 진실되게 반영된 이 연작들을 통하여 우리는 궁극적으로 외로움의 미학이나 기의 미학이라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어 대자연-우주의 심미적 근원을 만나게 됩니다.
*** 더 많은 그림과 고충환 선생의 탁월한 평문은 http://www.mooninhwan.com/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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