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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풍경 : 회화의 본질

미술 이야기

by 최용성 2007. 7. 2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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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태묵 화백은 진정한 의미에서 다재다능한 작가입니다. 인물이나 정물도 잘 그리던 화가는 어느 날 다른 영역들을 접어두고 풍경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 안에서도 작가는 안주하지 않고 다채로운 변화의 여정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안동의 모래밭이나 눈 내린 들판, 산등성이를 그리면서 화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모래나 눈이 덮인 땅, 산등성이나 꽃밭, 강이나 하늘과 같이 풍경의 한 부분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도 속에서 우리는 화가가 추구하는 것이 서양화이되 동양화와 다르지 않은 여백의 미학임을 이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여백의 미학은 장태묵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질적인 전화(轉化)를 하게 됩니다.

 

    작가가 지금 천착하고 있는 소재는 물에 반영된 풍경, 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여백의 풍경’입니다. 초기에는 물 밖과 물의 화면구성비가 비슷하거나 어느 한쪽이 우세를 주장하며 옥신각신하는 듯한 과도기를 거칩니다. 그러다가 지금 작가의 그림에서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물의 표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에 반영된 바깥 풍경입니다. 반면 물 밖에 있는 풍경은 화면 위에 그저 조금 마지못해 자리하거나 화면 아래에 수초나 연꽃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도입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여전히 변화무쌍한 편이지만, 이제 물에 비친 풍경이 화면의 주인공이 되는 형태로 소재의 일관성을 획득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화면구도의 변화는 우연이 아니라 회화의 본질에 천착해 들어간 작가에게 필연적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물이 화면의 구도 대부분을 차지하기 전부터도 그의 그림에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풍경은 물 자체나 물 밖의 풍경이 아니라 물에 반영된 이미지였습니다.


    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쉴새없이 움직이고 변합니다. 물에 비친 외부의 풍경은 물 밖의 풍경처럼 고정되어 보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에 반영된 외부세계는 물의 유동성, 깊이와 어우러져 실재를 비추되 실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물은 반영된 사물을 선별하여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사물이 반영되어 선별되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장태묵 화백의 그림에서도 물에 비친 풍경은 왜곡됩니다. 하늘은 물에 반영되는 순간 물의 표면 위에 비친 빛 또는 여백으로 변하고, 나무는 마치 물 속에 원래부터 존재하였던 실재처럼 강하게 부각되며 화면의 주인공으로 행세하게 됩니다. 물에 반영된 나무는 실재(實在)가 아니라 물에 비친 그림자이자 작가가 밖의 원래 풍경과 무관하게 만들어내는 이미지이고, 작가가 만들어내는 관념일 뿐입니다. 이처럼 고정되기 어렵고 유동적인 대상을 과감하게 화면의 주인공으로 자리잡게 한 결과 오히려 물 밖의 세계가 물에 반영된 풍경의 이미지처럼 보이면서 현상과 본질이 전도되는 느낌이 생겨납니다. 다시 말해 사물의 본질이 원래의 대상물이 아니라 물 속에 반영된 대상물에 있는 것 같은 착시(錯視), 다시 말해 우리가 체험하는 실재와는 다른 전도된 미학적 체험이 가능해집니다.    

 

 

    실은 물 밖의 고정되어 보이는 풍경도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과는 달리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대 철학자가 아주 오래전에 통찰하였듯이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실재(實在)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2차원의 평면인 그림 위에서 화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을 고정시켜 보여주되 이미지를 고착시키지 않고 변화하는 사물의 본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설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 우리 의식/무의식의 비밀을 직관적으로 깨달으며 창조의 기쁨(고통)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예술작품이 갖춰야 할 덕목일 터인데, 장태묵 화백의 작품은 감상자를 기꺼이 창조의 마당으로 끌어들입니다. 물에 ‘반영’된 풍경이 화폭 위에 재현(반영)되어 고정되는 순간 작가의 관념이 만들어낸 풍경 뿐만 아니라 대상의 본질, 화가의 인식과정, 이미지 만들기라는 창작과정 그 자체의 생명력도 그림 속에 고스란히 남아 강력히 발언하는 듯한 독특한 느낌은 장태묵 화백의 그림이 갖는 묘한 아우라(aura)일 겁니다.

 

 

    그림 속 물 밖의 풍경은 작가가 관념 속에서 구성한 실재(實在)를 반영한 1차적 이미지입니다. 그 1차 이미지가 그림 속의 물에 반영되어 이미지의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이 과정은 거의 무한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물에 반영된 이미지는 그림 속의 그림, 회화 속의 회화와 같이 보입니다. 그것은 실재를 전부 담아내지 않으며 이미지의 거울을 만들어냅니다. 거울은 무엇이든 비추지만 실재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거울과 같은 물의 실재와 반영된 이미지의 경계를 흐리면서 공간의 여백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그림에 두 개, 아니 그 이상의 수많은 그림이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실인 풍경, 물에 반영된 이미지, 이미지의 이미지가 거듭되면서 관념화되는 진경(眞景), 그리고 감상자가 그에 창조적으로 대응하여 자신의 관념으로 재창조하는 풍경 등등.

 

    작가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가 보기에 그의 그림은 자연, 생각, 창작과정, 그리고 감상이 어떤 과정으로 한 자리에서 만나는지를 정말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장태묵 화백의 <여백의 풍경> 연작은 진정으로 회화 그 자체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그림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미술 본연의 즐거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구도와 색, 빛, 형상, 공기를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 있는, 진정 미술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거장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장태묵 화백의 작품세계는, 대상의 반영을 통하여 실재를 사유하고 구성하는 우리들의 인식과정, 그리고 그 미술적 재현과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녹색의 빛이나 여백이 주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느낌을 순식간에 뛰어 넘는 화가의 터치는 강렬하고, 그가 구사하는 색채는 원초적 색을 보듯이 찬란하고 화려합니다. 그림의 대상들이 날카로운 붓끝에서 독특한 회화적 질감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한 그의 그림 속에는 어떤 날카롭고 강력한 자기 주장이 담겨져 있는데, 이것은 작가 스스로 겪었던 창작의 고뇌를 숨기지 않고 그림 속에 그대로 담아내는 데에서 연유합니다. 그의 그림이 뿜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구현하는가, 이미지 밖의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며 상상력의 힘으로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여백의 풍경을 찾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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