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균 화백의 1989년 작품 <포구의 오후>입니다. 포구 한 쪽에 앉아 다 타들어간 담배를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과 손에서 오랜 세월 이어져온 삶의 흔적이, 고된 노동의 무게가 절절이 배어나옵니다. 이런 점에만 주목하면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리얼리즘 작품이라고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치는 사실주의의 틀을 뛰어 넘습니다. 작품 속의 인물과 주변이 하나로 되는 듯한 독특한 조화감, 그에 기인하는 미학적 감동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 볼까요.
화면의 왼쪽에 크게 자리잡은 인물의 뒷 배경 왼쪽 화면에서 시작된 하늘과, 셋으로 분할된 땅의 풍경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하늘이 확장되는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됩니다. 언덕배기 땅의 능선이 화면의 절반에 못 미쳐 주저 앉으면서 바로 그 아래 왼쪽에서 진행되던 땅의 수평적 진행에 속도감을 줍니다. 그 결과 정적인 지평선이 동적으로 확장된 하늘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오른쪽 아래 자리잡은 뒤틀려진 배는 인물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암시하며 평면적으로 끝날법한 아래쪽 풍경에 가벼운 긴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화면 오른쪽 위를 향하여 운동하는 듯한 두 개의 물 웅덩이가 보입니다. 원근법에 따라 아래쪽 것은 크고, 위쪽 것은 작은 이 물웅덩이는 큰 하늘과 대비된 땅의 생경한 색감과 질감을 무리없이 연결해주어 작품 전체의 미학적 균형을 만들어냅니다. 물웅덩이는 축소된(반영된) 하늘이고, 하늘은 확장된 물웅덩이 땅입니다. 하늘은 땅을, 땅은 하늘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땅과 하늘이 물로 이어져 생명의 큰 순환이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특히 강연균 화백의 독창적 예술성은 그만의 독특한 색채에 의하여 발현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강연균 화백을 흙의 화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의 작품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든 고향의 흙이 주는 원초적 질감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로 그가 쓰는 흙의 색이 갖는 힘에서 비롯됩니다. 그가 사용하는 흙의 색은, 고향처럼 따뜻하고 이상화된 이호중 화백의 황토와는 다른 근원적인 흙,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의 흙 그 자체의 질감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진정 보편적이면서 한국적입니다. <포구의 오후>에서도 인물의 피부색, 상의의 색은 주변의 흙의 빛깔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구름도 흙의 색감을 간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흙은 만물의 근원과 같은 기운을 뿜어냅니다. 결국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나고 죽음, 생명의 순환을 작가는 이 작은 수채화 한 폭 안에 담아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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