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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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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성 2007. 6. 2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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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래틀은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주연을 맡았던 영화 <헨리 5세>(패트릭 도일 작곡)의 사운드트랙 음반을 버밍엄 심포니와 녹음하여 큰 성공을 거둔 일이 있다. 반면 베를린 필하모닉이 영화음악 사운드트랙을 녹음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최고임을 자부하는 베를린 군단은 거장 중의 거장인 코른골트나 로자의 영화음악조차 연주한 일이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었으니 이러한 변신은 파격이라 할 만 하다. 이를 두고 클래식 음악이 쇠락하거나 타락하는 징후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고, 그것이 더 좋을지 나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나처럼 영화음악의 교향악 전통을 사랑하고 옹호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오히려 베를린 필하모닉이 영화음악 장르에 늦게 뛰어든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한국판과 유럽판 앨범 표지

 

    ‘페일 3’(Pale 3)라는 이름의 밴드로 활약하는 세 사람(그 중 톰 트위케르는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이 작곡한 음악 자체는 상당히 괜찮다. 독창과 합창이 동원되어 아아-, 우우- 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사람을 도취하게 만드는 탐미적인 선율도 돋보인다. 매력적인 음악임에는 틀림없다. 요즘엔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영화음악도 흔치 않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합주력은 역시 최고이다. 녹음도 우수하다. 누가 보더라도 정성껏 만든 음반이어서 이 정도라면 적극 추천할만한 하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3인의 작곡가들이나 지휘자, 음반제작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래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선택이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왜?

 

미국판 앨범의 표지

 

    한마디로 말해 이 음악은 걸작 관현악곡의 정수를 보여주지 못한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 시작하여 모리스 라벨, 버너드 허만, 대니 엘프먼, 쯔비고뉴 프라이스너나 제리 골드스미스 등등의 여러 작곡가들의 어법이 혼합되어 적절히 활용되고 있지만 정작 창작자 자신의 지문(指紋), 내 눈엔, 잘 보이지 않는다. 로자의 <벤허><엘시드>,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스> 같은 관현악 영화음악의 걸작들은 지휘자의 해석과 오케스트라의 기량에 따라 음악 자체의 가능성이 한없이 열려져 있다. 바로 그처럼 창의적으로 잘 작곡된 관현악곡들이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먼 래틀 같은 세계최고의 예술가들이 연주하여야 할 영화음악이다. <향수>는 세계최고 교향악단의 영화음악 데뷔에 걸맞는 작품은 아니다. 단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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