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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을 위한 변명

음악가와 음악

by 최용성 2007. 7. 2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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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른골트냐, 쇤베르크냐 

     20세기 초반 후기 낭만파가 지배하였던 비인 음악계의 여론은 앞으로 20세기를 이끌어갈 두 사람의 천재로 코른골트(아래 왼쪽 사진)와 쇤베르크를 꼽았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꿨다.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겪은 세상은 옛 시대의 음악전통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후기 낭만주의 조성음악 전통은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무조나 음렬에 기초한 진보음악만이 현대와 미래의 음악으로 숭앙되었다. 조성에 충실하였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코른골트는 잊혀지고 쇤베르크가 영원히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 댓가로 진지한 음악은 청중들과 격리되기 시작하였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영화음악을 저평가해온 기저(基底)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음악사의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초기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개척자들은 미국 작곡가들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하여 유럽을 떠난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들이었다. 이들의 클래식영화음악은 이처럼 시대 변화와 함께 진부한조성음악이라는 이유로, 게다가 상업적인 실용음악이라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전문가들로부터,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클래식 애호가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

 

고전영화음악이 남긴 것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른 목소리가 생겨났다.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존 마우체리는 서양고전음악의 전통(조성음악 전통)이 할리우드 황금기 영화음악을 통하여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 이르러 불기 시작한 말러의 복권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란 세대가 그 분위기와 정신을 전해주는 클래식영화음악을 통하여 후기낭만주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결과라는 것. 아닌게 아니라 현대인들이 생애 처음으로 교향악단의 거대한 음향을 체험하는 장소는 심포니 홀이 아니라 영화관일 확률이 더 높으니 분명히 마우체리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오손 웰즈와 버나드 허먼

 

    여기서 마우체리는 한 발 더 나간다. 영화음악이 음렬주의나 무조음악에도 청중을 만들어주었다며 20세기 주류음악계를 신랄하게 조롱한 것. 현대의 공포영화에서 어김없이 이러한 종류의 음악들이 사용되어 그 애호가들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할리우드 황금기가 지난 뒤의 일이다.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 1911-1975. 오손 웰즈와 나란히 찍은 위 사진 왼편. 젊은 시절 진보적음악으로 주목받았으나 영화음악을 작곡하면서부터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로 자리잡았다)이 자신의 초기 현악합주곡의 진보적스타일을 <사이코>에 도입하고, 헨체의 현악 4중주를 공포영화에 사용하는 등 무조음악이나 12음 기법 음악이 영화음악에 본격 도입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니까.

제리 골드스미스(1960년대)

 

    1960년대부터-좋게 보자면 영화음악의 표현기법이 다양화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팝음악의 총공세 속에서 진지한 예술혼에 터잡았던 황금시대 영화음악은 쇠퇴하고 앨범 판매를 위한 히트송 홍보용으로 영화음악은 새로 자리매김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황금기 영화음악의 거장들은 순수음악과 영화음악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말러, 코른골트, 젬린스키 등 후기 낭만주의가 세기말의 음악으로 각광받기 시작하고 황금기 영화음악의 전통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 존 윌리엄스의 <스타 워즈>를 필두로 황금기 영화음악의 전통이 일부나마 계승되기 시작한 것. 코른골트, 로자, , 왁스만의 콘서트 음악들도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 그리고 조성음악을 더 이상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

 

존 윌리엄스, 앙드레 프레빈, 미클로시 로자

 

황금기 거장들의 영화음악

    황금기 할리우드의 거장 작곡가들은 후기 낭만주의의 바탕에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을 결합시켜 현대적인 영화음악을 창조해냈고, 그 작품들이 쌓여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할리우드 황금시대 거장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영화음악 같다라고 비아냥조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방향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것이다. 황금기 할리우드 영화음악은 바그너의 악극에서 확립된 라이트모티브 기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어떤 인물이나 배경, 사물을 상징하는 악구를 미리 정하여 두고-일종의 약속-반복하여 들려줌으로써 극음악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라이트모티브이다. 예를 들어 미클로시 로자의 <벤허>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거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늘 같은 주제를 사용한다.

 

    이에 비판적인 사람이 아론 코플랜드였다. 인물의 클로즈업이 불가능한 무대에서는 라이트 모티브로 관객의 시각을 보완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지만 클로즈업이 가능한 영화에서는 음악이 그러한 기능을 담당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그러나 코플랜드는 가장 유물적인 매체인 영화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고 심지어 악극에서조차 라이트모티브가 심리적 차원을 드러낼 수 있음을 간과하였다. 거장의 영화음악에서 라이트모티브는 영화의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일은 영화음악이 단순한 미키마우징(인물 등의 동작을 그대로 음악이 묘사하는 기능)이나 배경음악을 벗어나 영화의 정신을 음악화시켰음을 의미한다. 주제들 사이의 모순과 긴장, 변용, 그리고 발전은 곡마다 단절된 것처럼 여겨졌던 영화음악을 통일성 있는 전체로 만들어주었다. 예를 들어 미클로시 로자의 걸작 <줄리어스 시저>에 나타나는 시저(그가 죽은 뒤에는 안토니)의 주제와 브루터스의 주제 사이의 갈등과 해소는 특히 압권이다.

   

프란츠 왁스만

 

    그리하여 영화와 독립하여 들을만한 위대한 영화음악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로자, 코른골트, 왁스, 허과 같은 대가들은 각자만의 일관된 스타일과 음악적 아이디어가 반영된 뛰어난 영화음악들을 작곡하였다. 용광로처럼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획일적인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에서 이례적으로 개성있는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황금기 거장들의 고군분투가 있었던 것. 연주회와 음반을 통하여 더 폭넓은 청중들이 그들의 숨겨진 보물들을 진지하게 듣고 재평가하기를 기대한다.

 

변명

    음악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영화음악에 자주 쏟아지는 비판이 있다. 매체의 속성상 이미 청중들에게 익숙한 스타일을 쓰기 때문에 독창성이 없는 다이제스트 음악, 이미 촬영된 장면의 정해진 시간에 쫓겨 스톱워치를 놓고 작곡된 음악을 과연 진지한 예술작품으로 대할 필요가 있겠냐는 비판이 그것. 그러나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은 전통또는 모방에서 출발하고, 작가의 의도나 창작 배경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당대의 전설적 인물들이 여러명 보인다.(1946) Seated L to R: Franz Waxman, Dimitri Tiomkin, Meredith Willson, Bramwell Coles, Earl Lawrence, Wm. Grant Still.Standing L to R: Abe Meyer, Leith Stevens, Wm. Broughton, Anthony Collins, John Green, Miklos Rozsa, Victor Young, Werner Heymann, Leo Shuken, Arthur Bergh, Alex Steinert, Robert Emmett Dolan, Frank Skinner, Wilbur Hatch, Carlos Morales, Louis R. LipstoneOccassion: Meredith Willson was an admirer of the Salvation Army and its music. Bramwell Coles (pictured) ran the SA's International Music Dept in London; Bruce Broughton's grandfather ran the one on the west coast. On a visit to LA, Willson organized a lunch at the Friar's Club to honor Coles, inviting all the composers.

   

    영화음악을 작곡가의 스타일이나 구조의 관점에서 분석해보지도 않고 심지어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해서는 곤란하다. 왜 이 대목에서 하프가 사용되었고 저 대목에서는 오보에가 사용되었는지, 각 주제들이 영화라는 텍스트와 관련하여 또는 텍스트를 떠나 음악미학적으로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작곡가 고유의 스타일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생각하면서 영화음악을 대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에도 걸작과 범작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 특히 테마들을 이해하면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음악만으로 서사구조를 재현할 수도 있고, 심지어 영화와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각 주제들의 직조(織造)와 발전을 통하여 순수한 음악감상의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훌륭한 영화음악은 영화의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영혼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도 텍스트인 영화 자체를 뛰어 넘는다(연극을 보아야만 그리그의 <페르귄트>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작곡된 영화음악의 이러한 매력은 지적인 음악애호가들을 자극한다. 옛 영화를 전혀 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로자나 코른골트, 허먼, 왁스만, 월튼 등의 영화음악에 열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문제는 훌륭한 작품이냐 아니냐에 있지 장르에 있지 않다. 모든 편견을 훌훌 던져 버리고 여행을 떠나보자. 어느 틈엔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가슴을 시리게 하는 비경(秘境)과 숨은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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