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것처럼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푸르트벵글러의 음악혼을 계승하는 지휘자이다. 그에 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의 유산 중 베토벤이나 부르크너 교향곡 전집, 바그너의 오페라 등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하는 사람이 많고 나도 그에 동의하는 쪽이다. 그런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고 연주하는 모차르트가 어떨지는 들어보지 않아도 대체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DVD를 통하여 듣게 되는 것은 역시 독일 낭만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본 모차르트의 음악이다. 작은 편성으로 연주하더라도 확실히 장중하고 품격 있다. 베토벤 이후까지 시대악기 연주나 그 영향을 받은 해석이 지배하는 요즘 시대에 이런 식의 접근은 시대착오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유행을 따르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찰스 매케러스(그의 텔락 사이클, 린에서 최근 발매된 후기 교향곡집 SACD는 학구적 해석이 건강한 감성과 결합하여 최고수준의 살아있는 음악으로 표현된 본보기가 됨직하다)를 제외하면 요제프 크립스, 브루노 발터, 콜린 데이비스, 칼 뵘, 네빌 마리너, 카라얀 같은 구시대 거장들이 지휘한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하는 내 취향에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고 연주하는 모차르트가 좋게 들린다.
바렌보임은 EMI에서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교향곡 일부와 피아노 협주곡집을, 텔덱에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집을 각 출시한 일이 있으니 모차르트 전문가라고 부를만하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집은 두 개 사이클 모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불행히도 나는 그 음반들을 들어 본 일이 없어 이 DVD에 담긴 ‘하프너’나 ‘린츠’, 제22번 피아노 협주곡의 연주를 바렌보임의 성장 또는 변화라는 관점에서 차분히 평할 입장은 못 된다. 그러나 이 DVD만 놓고 보더라도 음악을 완전히 장악한 바렌보임의 손길에 따라 밀도높고 장중한 음향을 지닌 베를린 군단은 멋진 결과를 창출해낸다. 물론 대목 대목에서 맥케러스처럼 신선함과 발랄함이 나타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울 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두 지휘자가 곡에 접근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니 문제삼을 일은 못된다.
피아노 협주곡 제22번은 모차르트의 협주곡 중 인기곡은 아니다. 기이하게 평소 들은 기억조차 없다. 그러나 곡을 너무도 잘 아는 듯 태연한 바렌보임의 여유만만한 독주와 지휘 속에서 곡이 가진 매력이 잘 살아난다. 늘 그렇듯이 그의 타건은 명징하고 아무런 의심이 없으며-이런 내적 확신은 모차르트 음악의 연주에서 아주 중요하다-자신만만하지만, 괴팍한 편향 없이 무게있는 관현악과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사랑스러운 호른 협주곡 제1번은 조금 빠른 템포로 곡을 풀어간다. 체코 출신이자 베를린 필의 단원이기도 한 라덱크 바보르작의 독주도 훌륭하다. 이처럼 바렌보임의 피아노나 지휘 어디에도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지만, 음악 자체와는 무관하게 그의 눈빛이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곡을 너무 쉽게 장악하여서인지 긴장이나 치열함은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묘한 착시감도 생길 수 있을 것같다. 시각적으로 중후하고 비장한 인상의 연주자를 선호하는 듯한 우리 풍토에서 바렌보임이 저평가받는 이유가 혹시 이런 데에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베를린 필 콘서트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는 뛰어난 독주자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목관이 주된 역할을 하는 모차르트의 곡에서 플루트의 엠마뉴엘 파위, 오보에의 알브레히트 마이어와 크리스토프 하르트만, 첼로의 루트비히 콴트 등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주회에서 팬들을 열광시킬 카리스마를 가진 명연주자들이 아닌가. 또 다른 재미는 2005년 내한공연 당시보다 여성 단원들이 많아진 것 같다는 점이다. 특히 바이올린 파트의 매력적인 젊은 미녀는 어쩐지 한국 여인 같다. 카라얀 시절 자비네 마이어를 들이느냐 마느냐로 전쟁을 벌였던 베를린 필의 남성왕국시대가, 다행스럽게도(!),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나왔던 프라하의 유서깊은 Estates Theatre에서 이루어진 공연실황을 담은 이 라이센스 DVD는 화질 면에서 HD영상을 옮겨놓은 듯 선명하다. 카메라 앵글이나 변화도 다양한 편이어서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돌비 디지털이나 DTS를 지원하는 음향은 2채널 PCM보다 공간감을 확장시키지만, 마스터링의 문제 때문인지 중고역 쪽에서 약간 피크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흠은 감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연주회 실황 외에 아무런 부록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음악은 음악으로만 듣고 평가하면 되지 지휘자나 연주자의 발언을 듣는 것은 별 의미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거기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들 음악에 대한 바렌보임의 발언을 듣고 참조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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