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장기공연의 역사가 길지 않은 우리에게 고전 뮤지컬들은 대부분 영화로 기억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제목을 들으면 아마도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순진한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그 때문. 만약 줄리 앤드류스가 먼저 떠오른다면, 보통 수준은 넘는 뮤지컬 팬일 것. 영화 버전에서 오드리 헵번은 상당히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지만,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불운을 겪었다. 8개의 오스카를 거머쥔 이 영화의 주연이면서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기 때문. 브로드웨이와 런던에서 주인공 역을 제대로 소화해낸 줄리 앤드류스가 캐스팅되지 못한 데 대한 동정심과 대부분의 노래를 마니 닉슨의 더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오드리 헵번에 대한 반발심이 합친 결과라는 것이 중론인데, 물론 공식적으로야 누구도 확인해주지 못할 터. 어쨌든 젊은 줄리 앤드류스가 부르는 노래는 세월의 무게를 훌쩍 뛰어 넘는 매력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 정확한 발성과 음처리를 자랑하는 줄리 앤드류스만큼 엉터리 런던 사투리를 구사하다가 고급 영어를 사용하는 숙녀로 변신해가는 처녀 역에 적합한 뮤지컬 배우가 달리 어디 있겠는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의 내용은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게 되는 피그말리온의 신화에서 따 왔다. 음성학자 히긴스 교수가 친구와 내기를 건다. 런던 사투리가 심한 꽃파는 처녀 일라이자를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상류여성으로 만들겠노라고. 우여곡절 끝에 음성학자는 내기에서 이기지만, 이 모든 것이 농간이었음을 안 꽃파는 처녀는 그를 떠나고 제 잘난 맛에 살던 음성학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음을 깨닫고 상실의 감정을 노래한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존심 강한 그는 태연한 척 일상으로 돌아간다. 결과는 해피 엔딩! 작사가 러너(Alan Jay Lerner)와 작곡가 뢰위(Frederick Loewe)는 이 뮤지컬에서 ‘더 레인 인 더 스페인’(The Rain in the Spain), ‘밤새도록 춤출 수 있어’(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처럼 주옥같은 명곡들을 만들어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2년 간격으로 2개의 오리지날 캐스트 앨범이 나올 정도로 브로드웨이와 런던에서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다. 하나는 여기 소개하는 브로드웨이 캐스트 음반이고, 다른 하나는 스테레오로 녹음된 런던 캐스트 음반이다. 주요 배역인 줄리 앤드류스, 렉스 해리슨, 스탠리 할로웨이는 그대로이고 수록곡도 동일하지만(런던 캐스트 CD 버전의 경우에는 퍼시 페이스의 모노 녹음인 대사관 왈츠를 하나 더 수록하였다), 세월의 흐름은 음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첫 앨범에서도 훌륭하였던 줄리 앤드류스와 렉스 해리슨의 표현력은 2년 뒤에 녹음된 스테레오 앨범에서 더욱 원숙해졌다. 줄리 앤드류스의 런던 사투리는 더 진짜같이 들리고(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니 음성학적 정확성의 관점에서 읽지는 마시기를!), 렉스 해리슨은 더 당당하게 히긴스를 표현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모노 앨범의 장점도 만만치 않다.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에서 줄리 앤드류스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메리 포핀스>에서처럼 충분히 꽃피어 오른 느낌을 주는 스테레오 버전과는 달리, 풋풋한 초짜와 같은 생동감과 순수함을 표현하고 있고, 이것이 역에 잘 들어 맞는다. 렉스 해리슨 역시 원숙하고 노회한 느낌보다 더 경쾌하고 허식이 없는 듯하다. 세부 사항의 차이를 지적하여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는 장점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두 음반 모두 결정적인 큰 차이 없이 훌륭한 연주이고 특별히 지적할만한 단점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SBM 방식이라고 명시된 스테레오 음반보다 아무런 복각방식 표시가 없는 모노 음반의 음질이 더 선명하고 생생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스테레오 마스터 테입이 더 자주 사용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테레오 음반에서는 중고역 쪽에 마스터 테이프의 열화를 느낄 수 있는 증상이 간혹 나타난다. 반면 모노 음반은 SBM을 사용하였다는 표시도 없고 국내제작반이지만 오히려 맑고 뚜렷하다. 물론 종전에 리뷰하였던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스테레오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1956년 당시 모노 녹음이 극점에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여러모로 의미있는 음반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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