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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메르가 연주하는 패르트, 글래스, 마르티노프

CD

by 최용성 2009. 4. 2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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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art. a에 움라우트)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두 대의 바이올린, 현악 오케스트라, 프리페어드 피아노로 편성된 이중 협주곡(1977)이다. 미니멀리즘을 원용한 작품으로 종 소리의 울림이 연상되는 음형전개로 인하여 시원(始原)의 세계를 떠다니는듯한 느낌이 든다. 첫째 악장에서는 역동적인 운동을 펼치는 부분과 바이올린 솔로가 조용히 흐르는 부분이 대비된다. 전반적으로 격렬하다. 정중동(靜中動)의 세계를 그린 둘째 악장에서는 카논을 타고 두 대의 바이올린이 탄식하는 음조를 대화처럼 느릿느릿 주고 받는다. 다른 세상을 희구하는 듯한 대화는 신비로우면서도 슬프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악상의 굽이굽이마다 색채와 변화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기돈 크레메르Gidon Kremer)와 타챠냐 그린덴코가 바이올린을 맡아 에리 클라스(Eri Klas)가 지휘하는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협연한 음반은 긴 호흡으로 탄식하는 듯 음표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연주이다. 특히 하일라이트인 둘째 악장에서는 비교 음반 중에서 가장 느린 템포로 연주하고 있다. 가장 빠른 길 샤함, 아델레 안토니, 예르비/와테보리 교향악단(DG 457 647-2)보다는 무려 5분이, 중도적인 얀 죄데르블롬, 테로 라트발라, 칸토로우/타피올라 신포니에타(BIS CD 834)보다는 약 2분이 느리다. 이 정도 템포 설정이면 보통 맥 빠진 연주가 되기 쉬울 터인데도 크레메르 팀은 긴 호흡 속에서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여 여운이 깊은 울림을 끌어내고 있다. 훌륭하다.

 

 

    길 샤함 팀의 연주는 빠르지만 조급한 느낌은 없으며 공간 사이의 여백을 아주 적절하게 그려나간다. 악기들의 색채감이 돋보이는 이 연주는 다소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곡에 놀라운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역시 훌륭하다. 칸토로우 팀의 연주는 크레메르와 샤함의 중간 쯤 어딘가에 위치하는 듯하다. 바로크적 감수성이 느껴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이 연주 역시 훌륭하다. 특이한 것은 세 연주 모두 시간의 차이와는 달리 연주 자체에서 템포의 차이가 별로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패르트의 종소리 미학이 갖는 힘한계?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미니멀리즘의 대가이다. 간혹 반복이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컴퍼니’(Company)는 그렇지 않다. 죽음을 주제로 한 베케트의 모놀로그를 위하여 작곡한 이 음악은 현악 4중주 버전도 있다. 글래스의 모든 특징이 함축된 짧은 곡이어서 글래스 입문자가 듣기에도 적합하다. 점층적으로 반복되는 운동감이 주는 쾌감은 글래스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이 곡과 타불라 라사, 그리고 다르프 이히(Darf Ich...)를 비교하여 들으면 글래스에게는 미니멀리즘이 그의 전부인 반면 패르트에게는 방법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그렇게 다르다. 타쿠오 유아사가 지휘한 얼스터 오케스트라의 낙소스 음반(8.554568)은 선이 굵고 거침없이 나가는 운동감이,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부드러운 음색을 바탕으로 곡의 변화를 짚어내는 섬세함이 각자의 장점이다..

 

    블라디미르 마르티노프(Vladimir Martynov) 컴 인!’(Come in!)이라는 제목을 단 6개의 모음곡에서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을 전개하고 있다. 극적 전개나 실험성은 거의 없으며 노골적으로 통속적이고 달콤한 음악이다. 1988년 작품이 맞는가 의문이 들 정도로 소박하고 편한 이 음악을 들으면서 따분해하거나 진부하게 느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선율과 화음, 리듬으로 이루어진 6개의 악장이 25분 이상 큰 변화없이 평온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상상해보시라.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이나 영국 근대 작곡가들, 예컨대 엘가의 곡이 연상되기도 한다. 노크를 암시하는 우드블록의 목탁소리(또는 시계소리) 같은 음향만이 20세기 작품임을 알려줄 뿐이다. 더욱이 이 곡 다음에 음반을 마무리하는 패르트의 다르프 이히’(1995년에 작곡되어 1998년에 개정)를 듣다보면 마르티노프의 몰개성이 더욱 거슬리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레메르의 아름다운 연주로 듣는 감미롭고 서정적인 우리 시대의 미니멀리즘 음악,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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