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헝가리는 위대한 작곡가와 지휘자, 연주자의 산실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위대한 작곡가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당장 바르톡과 코다이, 로자, 리게티 등이 떠오른다. 그들보다 앞선 시대에 유럽 음악 전통에 기반하여 좋은 작품을 많이 쓴 위대한 작곡가가 바로 도흐나니이다. 그의 음악어법은 브람스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고, 심지어 슈베르트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이처럼 도흐나니의 음악은 독일고전주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기 때문에 친숙한 느낌을 주지만, 아무래도 후세대 헝가리 작곡가들과 비교하면 민속음악의 색채는 짙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도흐나니의 음악에는 작곡가의 지문이라고 부를만한 강렬한 개성이 조금 부족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협주곡이나 실내악곡에는 걸작이 많고 현악4중주곡들도 그에 속한다.
과르네리 4중주단의 마지막 음반이라고 하지만, 평소 그들의 연주를 찾아 듣지 않았던 나로서는 연주사의 맥락에서 뭐라 평할 처지가 못 되니 그냥 새로 듣는 연주단체라 생각하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음반에서 듣는 과르네리 4중주단의 연주 스타일은 조금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강직하고 두텁다. 다양한 음빛깔을 만든다거나, 강약과 템포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하여 세심하게 밀고 당기는 악구를 연출하거나, 아스라이 피어오르고 사라지는 관능미를 자랑한다거나 하는 그런 연주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연주에서는 화사한 색채감이나 아기자기한 재미보다는 성실성과 집중도, 그리고 작품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여유있는 호흡이 두드러진다. 이런 특성에 도흐나니의 고전주의적 음악이 잘 들어맞을 것은 불문가지. 그 중에서 먼저 작곡된 제2번에서 과르네리 4중주단의 성실성과 선 굵은 접근은 큰 감동을 준다.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제1악장의 주제나 동기들이 나타나는 부분에 이르면 음을 하나 하나 차분히 쌓아 올려 하나하나 풀어가는 그들의 노력이 큰 빛을 낸다.
좀 더 활기차고 신랄하게 연주하는 코시안 4중주단(Praga)과 비교하면, 과르네리 4중주단이 연주하는 도흐나니 현악4중주곡 제2번은 스케일이 크고 대범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도흐나니 음악의 고전주의적 특성을 부각시킨 듯하다. 물론 SACD 포맷의 지원을 받고 있는 코시안 4중주단의 음반도 놓칠 수 없다.
격한 대목이 조금 더 늘어나고 표현력이 간결하면서도 원숙해진 10년 뒤 작품인 현악4중주곡 제3번에서도 과르네리 4중주단의 특징은 여전하다. 해산을 앞둔 노년의 4중주단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열정을 뿜어대고 있는 데에는 존경심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불행히도 조금씩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큰 흠이 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이 곡이 3년에 걸쳐 나누어 녹음된 이 음반에서 가장 마지막 녹음인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연주력의 쇠퇴가 시작되고 있었던 징후가 아닌가 싶다.
졸탄 코다이의 현악4중주곡 제2번에서도 과르네리 4중주단은 선이 굵고 풍성한, 고전적 기품이 있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여기 있다. 코다이만 되어도, 바르톡 정도는 아니지만, 도흐나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혁신적인 면모가 많다. 이 곡에서 과르네리 4중주단의 접근방식은 너무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하다. 이런 느낌은 하겐 4중주단이 초창기 때 연주한 음반(DG)과 비교하면 더 커진다. 하겐 4중주단은 압도적인 기교로 코다이 음악이 지닌 다양한 헝가리 색채를 발산하면서 조이고 풀고, 밀고 당기면서 음악 만들기와 듣기의 즐거움을 청자와 함께 나눈다. 코다이에 관한 한 내 취향은 단연 하겐 4중주단의 음반이지만, 과르네리 4중주단의 연주 역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과르네리 4중주단의 마지막 앨범은 악기음을 직접 포착하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풍성하여 듣는 즐거움을 주는 녹음이지만, 공간감의 조망에 치중한 편은 아니다. 헝가리안 앨범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두 사람의 거장 벨라 바르톡과 미클로시 로자의 4중주까지 포함하여 2장의 앨범으로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같지만, 이 정도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4중주단의 마지막 앨범으로는 손색이 없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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