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한 바흐 첼로 모음곡에 관하여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 연주가 광채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최초 녹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던 양심 그대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은 곧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예술가라고 해서 인권이라는 것의 의미가 일반 사람들보다 덜 중요할까요?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간의 의무로부터 그를 면제시켜 줍니까? 오히려 예술가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와 자유로운 탐구, 바로 그것이 창조력의 핵심입니다”(앨버트 칸 엮음/김병화 옮김,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한길아트)라고 설파하였던 카잘스의 예술혼이 풍성하고 자유분방하면서 깊이 있는 낭만적 연주로 구현되었기에 시대를 뛰어 넘어 불멸의 가치를 얻은 것.
음반에는 원본이 있다. LP 시절에는 마스터 테입에 연주를 고정하고, 주로 그것을 복제한 2차 마스터 테입들로 스탬프를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아날로그 마스터 테입의 재생 편차로 말미암아 제조공장에 따라 서로 다른 음향을 지닌 LP들이 만들어졌다. 아날로그가 자연스러운 소리라는 믿음에 미신적 요소도 개입될 수 있다는 뜻이다. SP 시대에는 아예 마스터 테입이 없었기 때문에 CD를 만들려면 마스터를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 이 경우 오리지날이라고 해서 진정한 원음을 담고 있는지, 상태가 최상인지 아무도 자신하지 못한다. 그 결과 상태 좋은 SP 음반을 고충실도로 재생하여 리마스터링한 ‘복제’ 음반이 오리지날 음반을 능가하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는 것. 카잘스의 바흐를 리마스터링한 4개의 음반을 비교하여 들어 보니, 역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오랫 동안 사랑받아온 원반격인 EMI 음반은 애비로드 테크놀로지(ART) 리마스터링을 한 덕분인지 잡음이 적당히 제거되어 편하고 자연스러운 SP음향을 들려준다. 인위적으로 잡음을 줄이다보면 악기를 둘러싼 공기감마저 없어져 답답한 음향이 되기 쉽다. 다행히 EMI의 엔지니어들은 이 부분에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트랙마다 위화감이 없고 일관된 음 조성을 한 실력이야말로 특히 높이 평가할만 하다. 이래서 원조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낙소스 레이블의 SP 복각은 EMI에 비하면 조금 어둡고 차분하며 게인이 낮다. 이쪽도 자연스럽고 셈여림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카잘스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복각이지만 조금 더 밝고 편한 EMI의 음반을 대체할 정도의 당위성은 부족하다.
놀라운 것은 일본 레이블인 오푸스 쿠라의 복각반. 가장 상태가 좋은 SP를 구하여 복각하였다고 하는데, 그 결과는 새로운 음반이라고 할 정도이다(물론 원녹음의 한계는 감안해야 한다). 우선 4종의 음반들 가운데 잡음이 가장 많이 들린다.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일 수 있겠지만, 그 대신 중고역의 생생함과 개방감을 얻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첼로의 저역도 EMI나 낙소스의 리마스터링에 비하여 더 묵직하고 풍성하다. 첼로 본연의 음역대가 고르게 잘 구현되다보니 그 동안 느끼기 어려웠던 섬세한 뉘앙스가 생동감 있게 살아난다. 머뭇거리지 않고 곡의 핵심을 향하여 빠르고 자유롭게 질주하는 카잘스의 모습이 새로워 보일 정도이다. 만약 이러한 리마스터링이 대역을 과장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성과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리마스터링의 기초가 된 SP 상태가 일관되지 않은 탓인지 트랙마다 음질, 주로 잡음의 정도에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 나라 음반사인 굿인터내셔널의 모노폴리의 복각은, 언뜻 들으면, 잡음이 많이 제거된 오푸스 쿠라의 음반 같다. 악기음의 게인이 높고 힘차며 중역대가 심지 있고 저역도 풍성하다. 그렇지만 잡음이 없어진 대신 중고역의 생동감, 공기감, 개방감이 사라졌다. 그 결과 다이나믹스도 다소 인위적이다. 그냥 듣기엔 잡음이 없어 좋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음악듣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사라진 셈이다.
증폭된 잡음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푸스 쿠라의 복각판이 가장 추천할만한 선택이 될 듯하고, 음향에 일관성이 있고 과장되지 않아 오래 듣기에 편한 EMI 음반의 저력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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