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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작곡가를 위하여-코른골트 교향곡 SACD

Erich Korngold

by 최용성 2012. 8. 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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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평생 이상적인 현대음악을 찾아 왔다. 이 교향곡이 바로 그 작품이다. 다음 시즌에 지휘하겠다.” 그리스 지휘자 미트로풀로스가 1959년에 글로 쓴 마지막 약속은, 그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게 코른골트의 교향곡 F#, 작품 40은 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세계대전이라는 참화를 겪은 시대는 코른골트의 ‘낡은 미학을 외면하였다. 쇤베르크와 함께 20세기 서양예술음악을 대표할 양대 산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던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는, ‘시대착오적 낭만주의에 더하여 ‘대중에 영합한 영화음악이라는 이중 ‘사슬’에 묶힌 채, 서양예술음악사에서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우리를 죽이는 것도 시간이고, 살리는 것도 시간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망각에 빠져들게 하였던 두 개의 굴레즉 영화음악과 후기 낭만주의가 코른골트를 다시 불러오는 열쇠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고전영화음악의 르네상스를 거치며 코른골트는 부활하였고, 그의 유일한 교향곡도 루돌프 켐페와 뮌헨 필하모닉의 초연 녹음 이후 20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중요한 레퍼토리로 자리잡고 있는 중이다.

 

    영화음악과 콘서트 음악이 섞이는 것을 경계하였던 미클로시 로자와는 달리, 코른골트는 영화음악에 쓰인 주제를 콘서트 음악, 예를 들어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에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영화음악이라는 것이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존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음악세계는 하나였고 두 세상의 만남에 어색함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맥락이 다르게 작곡된 영화음악의 주제를 사용하여서 그런지 이런 작품들에서는 주제들이 유기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교묘하게 짜깁기되어 있는 인상을 받기 쉽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더 그렇다. 주제들이 발전하고 앞으로 나가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보다는, 마치 제 자리를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조적 완결성도 훌륭하고, 실제로는 주제가 발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코른골트 음악의 한 특징이자 남들과 다른 매력인지도 모른다. 출발부터 이미 완성된 세계. 마치 그가 어린 시절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처럼.

 

    교향곡에도 그런 느낌은 남아 있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덜 하다. 첫째 악장은 절대음악의 진수를 보여준다. 피아노, 첼레스타, 마림바, 실로폰과 같이 다양한 타악기 무리들이 만들어가는 리듬 패턴 위에 클라리넷이 어둡고 쓸쓸한 선율을 노래하고, 그 주제를 현악군이 이어받아 목관악기들이 교차하면서 어두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관능성을 풍기는 주제가 달래듯이 대조를 이룬다. 이어 여러 음향 블록이 서로 충돌하거나 교차하면서 강한 추진력을 지닌 엇박자의 행진곡으로 발전해간다. 이 첫째 악장은 코른골트가 쓴 모든 음악 중 가장 모던한 느낌을 준다. 2악장 스케르초에서는 더 전형적인 코른골트를 만날 수 있다. 활기에 찬 음악은 비상(飛上)하는 희망을 가득 품은 채 새 세상으로 항해를 떠나는 느낌이다. 영화 <후아레즈>의 주제가 원용되고 있다. 느린 트리오와 함께 하는 구성이나 관현악법 모두 아주 주도면밀하게 짜인, 뛰어난 악장이다.

 

    셋째 악장 아다지오는 비극적이고 무거운 장송곡이다. 이 교향곡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추모하여 작곡되었음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영화 <엘리자베스와 에섹스의 사생활>, <안소니 애드버스>, <캡틴 블러드> 등의 영화음악 주제들이 절묘하게 짜여져 깊은 심리적 고뇌를 그려낸다. 20세기에 어디서 이런 아다지오 악장을 들을 수 있을까. 넷째 악장은 방향을 알 수 없이 변화무쌍하고 불안하게 움직이면서도 <킹스로>의 따뜻한 선율이 나타나 어두운 마음을 달래준다. 첫째 악장의 어두운 세계가 회상되거나 안착하지 못하는 전개로 말미암아 목적지는 더 불확실하고 그 결과 마음은 요동치지만, 그 속에서 코른골트가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것은, 결국, 희망이다. 갑자기 나타나 모든 불안감을 종결시키는 듯한 감동적인 마지막 화음-F#-에 그의 정직한 마음이 집약되어 있지 않을까? 이것이 조성음악이다! 이것이 교향곡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음악이다! 브람스처럼 네 곡의 교향곡을 쓰고 싶어 하였던 작곡가의 염원이, 연이은 좌절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마르크 알브레히트(Marc Albrecht. 코른골트의 신포니에타초연녹음을 지휘한 게르트 알브레히트와 친인척 관계는 아니지만,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서 게르트의 보조 지휘자로 활동한 인연이 있다고 한다. 마르크 알브레히트의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가 지휘자와 작곡가였으니 부전자전인 셈)가 지휘한 스트라스브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펜타톤 음반은 코른골트 음악의 외면적 화려함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담겨져 있는 여러 요소의 충돌과 조화를 절묘하게 포착한 명연주이다. 알브레히트는 교향곡에 강한 추진력을 부여하면서도 음향블록 사이의 미묘한 교차와 충돌 같은 미세한 흐름을 정교하게 포착하여 그것을 자연스럽게 전체 구조의 틀 속에서 풀어낸다. 특히 악기와 공간의 실재감, 텍스처의 세밀함, 전체 음향 골격의 명료함을 잘 살려낸 펜타톤의 SACD 녹음은 이러한 해석과 연주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녹음만 놓고 보자면 지금까지 나온 어떤 음반 중에서도 견줄 상대가 아예 없을 정도이다. 함께 수록된 초기작 <헛소동> 모음곡은 밝고 희망에 차 있던 젊은 코른골트를 만나게 해주는 멋진 보너스.

 

    코른골트 교향곡은 명반이 적지 않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좋은 의미에서 할리우드 고전영화음악의 화려한 정취와 박력이 물씬 풍기는 총천연색의 뵐저-뫼스트/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EMI), 상당히 느린 템포와 긴 호흡으로 후기낭만주의의 극한적 미학을 추구하여 심오한 정서를 만들어낸 앙드레 프레빈/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DG), 집중력 있게 할 말만 하는 루돌프 켐페/ 뮌헨 필하모닉의 초연반(Varese Sarabande), 유려하고 관능적인 에드워드 다운즈/ BBC 필하모닉 오케스트라(CHANDOS) 등등이 있다. 그 윗자리에 마르크 알브레히트의 새 음반을 올려놓고 싶다.

 

    21세기에도 코른골트의 르네상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대다수가 주류를 추종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조성음악가다라는 정신으로 영혼에 충실한 걸작을 쓰며 암울한 시대와 맞선 정직한 작곡가에게 그 정도 보상은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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