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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룰로이드 코플런드(Celluloid Copland): 애런 코플런드의 영화음악

CD

by 최용성 2023. 3. 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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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이 함께 사는 곳이어서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아야 앞뒤가 맞을 터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청교도 정착에서 서부개척사(실은 원주민 학살사’)를 거치며 형성된 앵글로 색슨 계열 백인들이 만들어 온 문화가―그보다 조금 뒤에는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더 창의적인 하위문화가 어우러져― 미국적인 것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20세기까지는 그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전형적인 미국적요소를 가장 잘 구현한 20세기 음악가 중 으뜸은 에런 코플런드(Aaron Copland, 19001990)일 것. 낙천적이고 진취적이며, 풍요롭고 안정적이며, 율동적이고 명쾌한 미국적정신이 그의 음악에 잘 구현되어 있다. 코플런드의 음악을 들으면 즐겁거나 여유롭게 평온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곡가답게 코플런드는 영화음악도 여러 편 작곡하였다. 그는, 유럽에서 이주한 작곡가들이 영화음악에 도입한 라이트 모티브 기법은 청중 대부분이 등장인물을 자세히 볼 수 없어 인물마다 고정된 라이트 모티브로 극의 중점을 부각시켜야 하는 오페라에 적합한 방식이지 이미 화면에 인물이 클로즈업되므로 굳이 음악으로 그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는 영화에는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판을 하였다. 확실히 그의 영화음악은 유럽에서 건너온 막스 슈타이너(미국식으로 읽으면 맥스 스타이너) 또는 스테이너),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미클로시 로자, 프란츠 왁스먼 등등의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2001년 텔락(Telarc)에서 나온 셀룰로이드 코플런드’(Celluloid Copland)는 에런 코플런드의 영화음악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품들은 모두 빼고, 가장 덜 알려진, 아니 잊힌 작품 넷을 세계초연한 CD이다. 지휘한 조나단 셰퍼(Jonathan Sheffer)와 이오스 오케스트라(Eos Orchestra)20003월에 공들여 연주하였다. 우리가 자주 듣던 코플런드 음악의 다양한 요소들이 짧은 모음곡을 통하여 매력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복잡하거나 대작이거나 마스터피스 급인 작품은 없지만, 1시간이 조금 안 되는 재생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이다.

 

    음반을 여는 곡은 1939년 세계박람회에서 공연된 레모 부파노(Remo Bufano)의 인형극을 위한 부수음악 마법에서 과학으로”(From Socery to Science)이다. 이 단순하지만 리드미컬한 음악은 955초 동안 중국풍에서 아프리카 부두(Voodoo) 음악 풍까지 마치 만화영화를 보듯 변화무쌍하게 진행되어 즐겁다. 1939년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도시”(The City)를 위한 음악은 더 섬세한 감정을 다루는 도시의 슬픔과 함께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는 점심시간 소방차같은 곡이 묘사음악다운 즐거움을 준다. 역시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인 커밍턴 이야기”(The Cummington Story, 1945)를 위한 음악은, “애팔래치아의 봄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서정이 흐르는 곡이다. 나치의 침공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북극성”(The North Star, 1943)지금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지만, 당시에는 소련 영토여서 뒷날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자 블랙리스트 파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소련을 옹호한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을 위한 음악 중 게릴라의 노래에는 힘찬 합창도 나오는데, 가사를 쓴 사람이 위대한 조지 거쉬인의 형 아이라 거쉬인(Ira Gershwin)이어서 더 흥미롭다.

 

The North Star, 1943 Film

 

    조나단 셰퍼가 지휘한 이오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코플런드의 유전자와 딱 들어맞는다. 많은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지휘한 베테랑답게 셰퍼는 영화음악의 극적 내러티브를 절묘하게 포착하여 영화를 상상하게 만든다. 오케스트라 모두 일급의 솜씨를 보여주지만, 특히 관악 주자들의 실력이 발군이다. 텔락은 오디오파일 레이블의 대명사답게 워낙 녹음을 잘 하는 음반사였지만, 이 음반의 녹음은 텔락의 기준으로도 최고 중 최고이다. 악기의 생생함과 에너지, 공간감이 대단히 잘 포착되었고, 마치 녹음현장에서 듣는 듯할 정도로 짜릿하다.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귀감이 될만한 훌륭한 녹음이다.

 

    이 음반은 텔락 레이블에서 발매한 데다가 당시 그라모폰매거진의 편집장 선정 음반이어서 흔쾌히 사서 몇 번 잘 듣다가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23 서울국제오디오쇼 구경을 갔다가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는 이 음반을 발견하고 반가우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찾아 들어보니, 이렇게 좋은 음반을 왜 그동안 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기회에 손 가는 대로 오래된 CD를 꺼내 들으며 내 컬렉션 안의 숨은 보물을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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